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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불로소득' 마인드가 벼락거지를 만드는 이유

인사이트 작성일 : 05-14 14:02:51 조회수 : 999
1. 

A는 빚이 1,800만원 
B는 빚이 1억8천만원이다.
B는 A보다 10배 빚이 더 많다.

누가 더 안전해 보일까?

대부분 A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B가 더 안전할 가능성이 높다.

2.

실제로 위에 언급한 사례는 
소득 상/하위 20%의 평균 부채규모인데,

A의 1,800만원은 소득하위 20% 평균부채,(1분위)
B의 1억8천만원은 소득상위 20% 평균부채다.(5분위)

(출처: 20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

대다수 사람들은 부채가 많으면 위험할 것이라 판단한다. 하지만 금융/자본세계에선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3.

신용도가 높다라는 것은 
대출 상환능력이 높다는 뜻과 같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이런 '능력'있는 
개인에게 더 많은 대출을 해줌으로써
더 많은 이자소득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다.


일례로

대기업 직장인은 연소득의 약 200% 대출이 가능하고,
의사 등 고소득 전문직은 2~3억 대출이 가능하다.
(아시다 시피 현재는 막혔다.)


이 정도 대출 상환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소득이 높은 측에 속하는 이들이
이렇게 까지 대출을 일으켜야 할까?


최근 부동산 상승으로 인해서
아무리 소득이 높다고 해도
실물자산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해
지금이라도 대출 얻어서 집을 매수하려는 
전문직을 주변에서도 종종 목격한다.


언론에서 말하는 '영끌'은 
주로 서민들이 자본이 부족해 영혼까지 
끌어다 쓴 것처럼 묘사하지만,


사실 사실 영끌의 대부분은 
소득이 높은 중산층이 했다고 판단한다. 


영혼까지 끌어서 대출을 한 게 아니라.
영혼까지 끌어서 계층 사다리를 올라 타려고 한 것이다.


지금 이들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다.

이들에겐 '영끌'이 빚이 아니라 '기회'였을 것이다.


4.

많은 사람들은 대출을 '빚'으로 간주하고 겁낸다.

20여년 전 IMF를 경험한 탓이다.


이 시절엔 대한민국 상위 30대 기업 중

절반이 넘는 16개 기업이 부채로 쓰러졌다.

가계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빚'이라는 단어엔 부정적 이미지가 있다.

빚과 연관된 단어봐도 그렇다.


빚 더미

빚 독촉

빚투(빚내서 투자) 등등

여러가지 부정어와 함께 어울려 사용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빚'은 그릇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럴 수 있다. 


'빚'이란 단어 자체는 금융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빚은 남에게 갚아야 할 돈 뿐만 아니라 '마음의 빚'이란 말 처럼 갚아야 할 은혜 따위도 해당한다.


반면 '부채'는 금융언어다.

남에게 갚아야 할 재화나 용역이다.


회계상에선 '타인자본'을 가리킨다.

그리고 재무재표에선 내 자산으로 표시된다.


순자산 30억에 부채 20억이면

나의 총자산은 50억이 된다.


다시 해석하면,

타인자본을 가지고 

내 자산으로 표시하는 행위가

바로 '부채'인 것이다.


그리고 그 타인자본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갚을 수 있는 능력인 '신용'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정리하여 결론지어 강조하면,


부채는 나의 '신용능력'을 가지고

타인의 '자본'을 레버리지로 끌어다 쓰는

나의 '신용자산'인 것이다.


대기업 혹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이러한 '신용자산'을 끌어다 쓸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중산층에게 부채는 

더이상 '빚'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채는

'권리'이자 '능력'이된다.


담보대출을 규제하고

신용대출을 막는 정부에 대해

중산층이 분개하는 이유다.


5.

그렇다면 정부는 

왜 이들의 권리를 부정하는가?


중산층의 이 같은 '권리'가 

현 정부의 입장에선 공공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해서이다.


이들이 일으킨 대출 레버리지가

자산가격 상승을 부채질 하고,

부동산으로 이익을 보는 계층과

피해를 입는 계층이 존재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의 중심에는 부동산을 불로소득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굳건히 서있다.


부동산으로 얻은 자본상승과 재산증식은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불로소득'으로 간주하고

이를 철저히 배척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자본이 자본을 버는 것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공정한 게임인가?

그들이 말하는 근로소득이 공정한 게임일까?


6. 

'근로소득'은 노동을 통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다.


노동으로 번다는 것은

노동의 질과 양에 따라 수익의 편차가 발생한다.


노동의 질은 '직업'이고

노동의 양은 '근로시간'이다.


즉, 아래와 같은 공식이 바로 근로소득이다.

노동의 질(직업/급여) X 노동의 양(시간)= 근로소득


그런데 이런 공식이 과연 공정한가?


노동의 질인 '직업'을 얻는 과정도

노동의 양인 '시간'도 사실 정확히 말하면

공정하지 않았다.


7.

현대사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양 날개의 균형으로 인류 진보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 체제를 지탱하는 근간은

'성과주의'다.


이 성과주의 교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열심히 노동자로 일하게 만들었다.


너가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가져간다.

는 말은 아메리칸 드림을 만들기에 충분했고,

평평한 운동장에서 모두 같은 기회를 가지고

노력한 만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적어도 초반엔 그랬다.)


버락 오바마는 

Yes, We can!을 외쳤고


지구 반대편의 정부는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외쳤다.


하지만 현실은 We can't 였고,

출발선의 기회 역시 평등하지 않다는 걸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애초에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아름다운 동화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약육강식의 네셔널 지오그라피 그 자체다.


8.

최근 유튜브에서 북한에 한 미녀가

중국 관광버스에서 마이크 잡고 노래하며

중국인 비위 맞추는 영상이 화재가 되었다.


그 영상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은 댓글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면 톱스타급인데, 태어날 때 좌표 잘못 찍고 태어나서 안타깝네요"였다.


근로소득의 근간인 '직업'

그리고 직업과 승진의 기회의 기반인 '성과주의'는

모두 '노력'과 '재능'을 기초로 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과 똑같은 노력을 했다면,

나에게 연봉 수천의 똑같은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좌표 아무곳이나 찍고 태어나도

똑같은 노력을 했을 때 같은 결과가 나와야

성과주의가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일부는 반론을 한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재능도 중요하다고.


하지만 재능이란 건 더욱 불공정하다.

시대의 수요에 따라서 편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식도와 위를 훈련해서 먹방을 찍는

유명 유튜버들에게 큰 기회와 부가 주어지지만,

그런 재능과 역량이 70년대 산업화 시대에선

아무짝에 쓸모 없었다.


호날두가 공을 다루는 체력과 발재간

슈팅하는 순간 판단 능력 등의 재능도

중세에 태어났다면 아무 쓸모 없다.


결국 

노동의 질인 직업과

직업을 결정하는 성과주의

성과주의의 핵심인 노력, 재능


이 모든 것은 완벽히 공정하다 볼 수 없다

또한 어떤 측면에선 오히려 불공정 하다.


시대에 흐름을 잘탔거나, 좌표 잘찍고 태어난 게

경쟁구도 상에서 노력만큼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노동의 양인 시간은 어떤가?

비정규직으로 갈수록 더욱 오래 고되게 일한다.


OECD국가중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는

멕시코 다음으로 대한민국이다.

독일인 보다 약 두 달을 자지않고 더 일한다.


이게 그들(현정부)이 주장하는

근로/노동소득의 민낯이다.


이들은 모든 불평등과 양극화의 문제의 원인을

'근로소득'과 '자산 분배의 불평등'으로만 봤다.


그래서 기업에 방망이 들고,

일자리 내놓으라 엄포놓고,

세금 걷어서 공공 일자리만 쏟아내는 것이다.


일자리가 내 밥벌이의 90%다 보니

일자리가 곧 인생이된다.


부모는 자녀의 노동의 질(직업)을 높이기 위해

자본을 굴리는 대신 사교육비로 자신의 가장 찬란한 시절을 희생한다. 사교육비 지출로 등골이 휜다.


자녀가 좀 더 좋은 직업을 갖거나 취직해서

노동/근로소득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노후엔 노인빈곤율 1위국가의 구성원이 되어

또한 번 빈곤율에 일조하게 된다.


노동소득 90%에 육박하는 나라의 이야기다.

노동만이 소득으로 인정하는 나라의 이야기다.


그러는 동안 상위그룹의 자본은 

더욱 빠르고 커다랗게 굴러가고 있다.


기회라는 건

노동/근로소득에만 국한 되지 않는다.

자본소득에도 기회가 존재한다.


이 기회의 사다리를 부러 뜨리며

근로소득만이 공정하다고 외치는 건

현시대 젊은 세대에게 기회를 박탈하고

재갈을 물리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소득의 한 부분에 

자본소득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고


자본/금융시장 건전성을 위해 자본교육을 장려하고,

근로소득 뿐만 아니라 자본소득도 인정하는 것이

그나마 출발선의 기회가 노동소득 홀로 있는 것보다

공정해지지 않을까.


노동소득이 내 소득 자산의 90%가 되면

상사의 부조리에도 눈을 감게된다.

잘리면 끝나기 때문이다.


또한 대기업/전문직/공무원만 선호하게 된다.

내 소득 자산의 90%기 때문에 노동소득의 질이 높거나 안전하게 유지되는 곳만이 살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가

임원이 되기 위해 또 다른 바늘구멍을 비집고 경쟁한다.


그러나 이미 부모세대로부터 자본교육 받고

자본의 힘을 믿고 자란 상위그룹의 자녀는

출발선이 저만치 앞서 가고있다.


남을 짓밟고 일어서야 하는 

전쟁터에 굳이 나가지 않는다. 


자신과 가족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돌볼 줄 안다.

무엇보다 여유가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자산은

근로소득 90%의 치열한 경쟁사회의 그들보다

앞서가고 있다.


9.

출발선 그리고 기회의 평등을 주장한다.

그런데 진정한 출발선 그리고 기회의 평등은

근로소득 뿐만 아니라 자본소득이 함께 할 때 

그나마 이루어 진다고 믿는다.


이미 사회는 저성장 국면으로 진입하여

자본/금융교육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해졌다.


지금이라도 정신차리고

자본/금융교육을 장려하고

재산소득을 불로소득으로 폄하해선 안된다.


PS.

2.4졸속 대책과 1가구 1주택 법안 발의..여전히 자본소득은 불노소득이다라는 근간에서 비롯된 참상입니다. 


이 세상은 공정한 경쟁 속에서 노동으로 

땀흘려 벌어야만 한다는 발상에서

이제 좀 자유로우면 안되는 걸까요?


적어도 우리 자녀세대에겐

땀흘리는 노동만이 전부가 아니라 가르치고 싶습니다.

글쓴이 : 닥터마빈, 출처 : 부동산스터디


출처: https://m.blog.naver.com/sonsarang38/222239932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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